- 작성시간 : 2012/01/28 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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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의 첫번째 명상을 통해 본
그의 방법적 회의, 그리고 이의 과학

출처: http://blaugh.com
데카르트의 이 짧은 글은 무척 생생한 설명을 통해서 그가 어떠한 체계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적인 감각을 의심하였는지를 전달하고, 또한 우리 독자들이 어떠한 방법들로 우리의 감각이 전해주는 정보를 의심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있다. 심지어 그는 이 생동감있는 회의주의를 빌어 독자들에게 "사악한 악마"의 존재를 상상하라고 조언하는데, 그가 말하는 이 악마란 존재의 이유와 의미가 우리를 속이기 위한, 즉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가 가장 확신하고 있는 감각들을 일부러 거짓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일 정도다. 역시 꽤나 드라마틱하다.
멍퀴가 데카르트의 방법론에 대해 가장 큰 의문을 제기하자면,
"르네씨... 대체... 대체 왜...?"
카르티지안 방법론과의 첫만남 직후에도, 형이상학 학위를 따고 난 지금도, 가끔 그의 글을 읽으면서도 왜 이 의심법, 그의 방법적 회의가 그렇게 중요한지, 대체 이 고생을 나보고 왜 하라는 건지!!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게 다가올 때가 있다. 이유를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건 둘째치고, 심지어 데카르트의 첫번째 명상에도 이러한 방법적 회의에 대한 목적은 제대로 설명되어있지 않다.
설명은 커녕 데카르트 본인의 말은 상황을 더 헷갈리게 만드는데, 이는 바로 그가 외부에서 오는 감각을 먼저 의심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이 감각이 가장 사실적이고, 직접적이고, 즉각적이고, 가장 실감나며 동시에 가장 의심하기 어려운 감각이기 때문'이라고 썼기 때문이다.
뭐야 대체!! [Expletives deleted]
하지만 다행히도 르네의 의도(적어도 그의 본래 목적)는 우리에게 지적인 고문을 가하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데카르트라지만 (<뭔 의미지?!)도 방법적인 회의론을 통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철학적인 도구를 사용하여 매분매초 우리 스스로의 감각이 제공하는 증거와 경험과 사물들을 의심하도록 유도하려는 악한 의도(...)는 없었으리라 본다.
일단 르네는 충분히 현실적이었기에 그런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방법적 회의론자의 삶을 자발적으로 택하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하지만 것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르네 본인조차 그러한 방법론적 회의의 삶을 살 가치가 없다고 느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가 아무리 의심의 중요성을 강조한들 우리가 매일 사는 일상 속에서 이 사악하다는 감각을 사용하고 또한 그 감각이 주는 경험에 의존할 것이라는 점은 안 봐도 뻔하다. 설령 이 감각이란 녀석이 100% 믿을 수 있는 우수신용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럼 왜? 우린 왜 그가 신용불량자라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빌려주지?
높고 지대하신 철학씨는 감각이 주는 모든 외부적 경험을 의심할 것을 강구하시지만,
그 감각 없음 어쩔 건데... 다른 방도가 없는데...
그러니, 왜 굳이 철학에 의존해가면서 일상의 경험을 거부하고 불가능한 (존재하지도 않는) 대안을 좇아야하냐 이거지.
에헴.... 땡!
***
자, 왜 땡 했는지 주절주절 또 헛소리를 해본다.
애초에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를 일상에 적용가능한 메소드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가 방법론적인 의심을 적용한 대상은 바로 그의 시대, 즉 17세기 초에 아주 새롭고도 논쟁적인 주제로 떠올랐던 말썽꾸러기 '과학적 지식'과 그러한 지식의 존재 가능성이었다.
수 세기 동안 사상가들은 순수 이성(natural reason)이 절대적이고 전적으로 확실한 형태의 진리를 제공해 줄 수 있다고 받아들였다. (Aquinas, anyone?)
이러한 순수 이성론의 궁극적 예제가 바로 수학과 기하학이다.
(여기서 기하학을 수학에 포함하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의 나의 얕지만 소신있는 논리를 바탕으로 내린 결정이다...)
예를 들어, 기하학 증명 모델을 하나 두고 생각해 보자. 이 기하학 증명이 확실하고 절대적인 지식(혹은 그러함 지식을 제공하는 지성)을 이성적으로 사용하는 모델이 되는 셈이다. 일단 유클리드 기하학 같은 수학적 공리(公理)로 시작한다. 간단하게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은 거리는 직선이다" 뭐 이런 거. 그리고 이러한 공리가 적용될 수 있는 일정한 수의 규칙을 정한다.
이제 이 규칙과 공리 체계가 설립이 되었으니, 몰래 새로운 공리를 하나 만들어낸다던가 하는 치사한 수법을 치거나 아예 사기를 치지 않는 한, 이를 바탕으로 삼차원 공간에 대한 많고 많은 절대적 지식과 진실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진실들을 도출해 내는 데에는 아주 조심스럽고 인내심있는 숙고와 고뇌가 필수적이지만, 그러한 노력이 가치있는 이유는 바로 공리, 규칙 체계를 바탕으로 순수 이성을 사용하여 (<강조! 왜냐, 여기서 순수 이성적, 직관적 수학과 근대 과학 지식적인 수학을 구분하려 하기 떄문) 얻어 낸 사실들은 모두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유클리드 기하학 예제와 같이 계몽 이전의 수학도 마찬가지였다. 순수 이성을 사용한다면 몇가지 기본적인 공리와 규칙 체계로 제한한다면 수나 수의 특성에 관한 와일드한 직관적 진리를 도출해낼 수 있었고, 수학자들은 철학가들의 논리와는 다르게 이렇게 성립해 낸 증명이 옳은지 틀렸는지 논쟁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나름 일반적인 수준의 수학적 증명에 대해서는 말이다. 추론적, 연역적 증명은 옳거나 틀렸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러니 옳다면 그 결론 역시 옳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갈릴레오가 수학을 두고 진실을 쓰는 언어라고 표현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의존하던 순수 과학자들은 수학이나 기하학과 같은 분야에서 일궈낸 지식의 확실성이 자연 연구에서도 성립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연구하기위해 열을 올렸다. 엄청나게.
하지만 그 확실성/절대성의 가능성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일까?
순수하고 추상적인 수학과 기하학의 세계와는 다르계 자연은 난잡하고,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데다 또 너무 구체적이기까지 하다. 수학 및 기하학의 디시플린, 특히나 이들의 메소드가 어디까지 자연학에 적용 가능할지에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17세기 과학자들이 유난히 관심을 보였던 천문학, 광학, 물리학과 같은 분야들은 수학적 이성과 논리를 일종의 모델로 사용할 수 있는 학문으로서의 가능성을 꽤 많이 보였다. 이 학문들을 통해 수학적 논리 모델을 사용하여 추상적인 수학적 개념뿐만이 아니라 관찰이 가능한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현상도 논증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았다. 심지어 이 모델처럼 물리적 현상들을 좀 더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규칙 체계로 축소시키는 것마저 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을 점차 알게된다.
하지만 생물학, 해부학, 생체학이나 의학과 같은 다른 과학 분야들에서는 이러한 수학적 논리 모델을 사용하는 것이 물리나 천문학에 비해 훨씬 덜 희망적으로 보였다. 이 분야들에서 직관적 이성으로 진리를 도출하거나 현상을 규칙 체계로 줄여내는 것이 아니라 비가 오는 이유라거나 여자가 임신을 하는 이유 등 단지 눈 앞에 일어나는 일들을 관찰하는 것이 다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카르트의 시대에 그와 비슷하게 수학적, 기하하적 논증과 증명을 모든 과학적 학문의 절대적 연구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과학자들이 있었던 반면, 베이컨을 중심으로, 자연 과학의 연구는 자연적 현상의 신중하고 반복적인 (강조) 직접적 관찰만을 바탕으로 해야하며 이러한 반복적 관찰을 통해 일반적인 규칙들만을 도출해야한다고 주장한 과학자들이 있었다. 이들의 대립은 나름 드라마틱했는데, 서로 대립했던 이들의 근본적인 방법론이 바로 연역적 vs. 귀납적 논리법에 대한 논쟁이다.
('베이컨을 중심으로'라는 말을 쓰는 순간...
난데없이 호머가 침 흘리는 이미지가 문득 스쳐가... 웃다가도... 나의 이런 모습에... 좌절...)
뭐 다 알겠지만 18세기, 19세기 들어 정립된 과학적 방법의 고전적인 모델은 결국 연역적, 귀납적 논법이 둘 다 옳음을 인정했다. 이 클래식 모델에 의하면 과학은 직접적 관찰과 수학적 모델링을 바탕으로한 연역적 추론 이 두 가지의 신중하고도 규칙성있는 관계인 것이다. 해양 진화 생물학을 전공하려는 학부생들이 뒤늦게야 대학 수학을 몇 년씩 들어야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좌절하는데, 이것이 바로 귀납과 연역을 둘 다 포용한 근현대의 과학적 방법론이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가장 가슴아프고 가장 뼈저리게 실감나는 증거이다.
결국 과학 철학은 이 두가지 논쟁을 둘 다 채택해버리는 관용적이고 현명한 돌파구를 찾았고, 그 덕에 현재로썬 명백해 보이는 클래식 과학적 방법론이 탄생했지다. 30-40년대 (물론 1630-40!) 르네군이 철학하던 시절에 해결책은 십만리 밖에서 코끝도 내밀지 않고 있었기에 르네는 이 논쟁을 이길 방법을 갈구하고 있었다.
여기가 바로 카르티지안 방법적 회의론의 큐 사인이다.
데카르트가 노린 것은 바로 추상 세계에서 그렇게도 우리가 추앙하는 수학적이고 기하학적 논증법이 과학 세계에서도 사용 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의 여부를 따질 수 있고, 또 실제 적용 방법도 제안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적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그 말인 즉, 르네가 제시한 질문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자연 세계에서 절대적인 진리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그의 첫번째 명상에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의 난처한 일부가 나타난다:
>> 일단, 우리가 아는 것은 오로지 감각 기관을 통해서이다.
첫번째 명상을 끝낸 이 시점에서 데카르트는 외부에서 오는 감각이 어떤 절대적인 진리의 직접적인 근원이 될 수 없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자연적으로 이러한 논리를 따르면, 르네는 이제 간접적인 감각이 주는 정보를 과학 연구에 있어 어떤 방법으로 얼마만큼 사용할 수 있는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용 불가능하다'라면...
미안하지만 그의 대답은 수학에서나 적용되지 과학에서는 성립될 수 없다...!!
(THERE!! I SAID IT, GODDAMNIT!!!)
과학에서 까지 그의 감각에 대한 불신이 적용 되려면 르네는 세 가지를 증명해야한다.
1) 먼저 적어도 경험의 몇 가지는 진실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확신 시켜야 하고,
2) 우리가 자연을 탐험하고 자연의 진리를 알아가는데 위 방법이 근본적 바탕이 될 것임을 보여야 하며
3) 또한 우리의 감각이 주는 '간접적' 정보 역시 과학적 지식에 쓸모가 있음을 보여야 한다.
하지만 르네는 이제 없지.



